알베르 카뮈 저자(글) · 김화영 번역
읽기 전에
글을 쓰게 된 초기 카뮈는 수첩에 다음과 같이 메모한다
1. 거부(부조리) : 이방인, 칼리굴라, 오해, 시지프 신화 - 방법론적 희의.
2. 긍정(반항) : 페스트, 정의의 사람들, 계엄령, 반항하는
인간.
3. 사랑 : 지금 계획 중, 집필 중.
《이방인》은 부조리한 상황을 거부하는 문제적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낸 소설로 카뮈 메모에서 첫 번째 주제 거부(부조리)'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두 차례에 결친 세계 대전을 겪으며 정신적 공허를 경험한 독자들에게 카뮈는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실존적 주체', '진실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뫼르소라는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한다.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굳세게 붙들고 있어. 그 진리가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만큼이나.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옮고, 또 언제나 옳아."라고 외치는 이방인에게도 그 실존의 가치와 자유를 부여하는 세계. 그러한 세계 속에 인간이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랑으로 향할 수 있을 것이다.
1942년 작.
뫼르소는 양로원에 있던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장례식에 참석한다. 엄마의 양로원은 멀었고, 엄마와는 이제 공통 대화주제가 사라졌다. 엄마는 뫼르소를 보면 울기만 했기에 엄마를 본 지는 일 년이 넘었다. 그는 엄마의 장례식에서도 울지 않았고 형식적인 장례 절차로 밤샘을 하고 피곤해한다. 그 과정에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
장례절차를 마치자마자 여자친구를 만나고, 전 부인이랑 문제가 있는 이웃과 친하게 지낸다.
뫼르소가 태양이 뜨거운 날 의도치 않게 아랍인을 죽이게 되는데, 이 사건은 아랍인 살인사건이 아니라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뫼르소의 인성재판으로 변질된다. 이 과정에서 뫼르소의 말은 묵살당하고 그들이 마음대로 해석한 뫼르소가 주가 되어버린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나는, 삶이란 결코 달라지는 게 아니며, 어쨌건 모든 삶이 다 그게 그거고, 또 나로서는 이곳에서의 삶에 전혀 불만이 없다고 대답했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었어.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야.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에 그곳에서 엄마는 마침내 해방되어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불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알베르 카뮈는 노벨상 수상자 중 가장 유명하다고 볼 수 있는 작가이다. 카뮈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이방인》이고, 코로나와 비슷한 상황으로 화제가 됐던 《페스트》도 그의 작품이다.
프랑스 노동자 출신으로 노동자를 위한 철학을 펼친 사람이기도 하다. 이방인의 해설서라고 볼 수 있는 《시지프 신화》를 읽어야 자세한 카뮈의 철학을 볼 수 있다는데 어려워서 읽기 쉽지 않다고 한다.
나는 《페스트》 오디오북으로 카뮈를 처음 접했고, 《결혼, 여름》을 읽으려다가 《이방인》을 완독 했다. 알베르 카뮈를 책으로 제대로 완독 한 이방인이 처음이라고 봐야겠다.
카뮈는 그 특유의 독특한 풍경 묘사가 있다. 아름다운 표현으로 서술하고 마지막 문장은 묘한 의미 있는 단어로 마무리하여 한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
내가 읽은 디에센셜 버전은 따로 해석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느낀 점도 새로운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아래부터 스포 포함)
《이방인》과 종종 같이 언급되는 것이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와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 둘 다 소시오패스인 것 같다는 의견이다. 나는 인간실격 당시 요조가 소시오패스라고 생각했지만 뫼르소가 그렇다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뫼르소'의 삶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공장에서 열심히 일해서 새로운 곳에 지사를 권유받을 정도였고, 여자친구와도 결혼을 앞두고 있었으며, 이웃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뫼르소는 지금 이대로 흘러가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변화도 자극도 원하지 않는다. 그는 지금 놀고 있는 바닷가 별장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미래를 계획한다.
여자친구가 결혼하자고 말했을 때 뫼르소 '네가 결혼하는 게 좋으면 하자'라는 식으로 말한다. 카뮈는 결혼을 하지 않은 이 상태도 좋고 결혼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뜻에서 말한다. 하지만 여자친구는 이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원하지 않지만 할게 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이처럼 뫼르소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면 사람들은 다들 한 발짝 뒤로 물러난다. 사람들은 정제되지 않은 표현보다 가공된 표현을 좋아한다.
장례식에서 울지 않고 커피를 마시면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는 평가도 참 단편적이다. 가족들이 장례식에서 울지 않으면 흉을 본다는 내용은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에서도 나왔었는데, 가족은 그가 병원에 있는 내내 슬퍼했기 때문에 장례식이 되면 슬픔이 끝났다는 마음이 든다는 내용이었다. 뫼르소와 엄마와의 관계를 사람들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나쁜 평가를 받는다.
(추가)
나는 이 책을 읽고 배우 이선균을 생각했다. 시기상으로 비슷한 면도 있었고, 내용상으로도 연관이 된다고 본다.
이선균은 성매매로 인한 공갈로 경찰에 갔는데 마약범으로 누명을 쓰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뫼르소는 정당방위로 볼 수 있는 살인으로 재판에 갔는데 사이코패스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당한다.
그들의 죄는 정당하게 평가되고 있는가. 주변사람들이 씌운 억지 프레임으로 그들의 이미지를 만들고 그들을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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